겪은 일과 하고 싶은 말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녀온 곳과 그날 있었던 일을 차례로 적고 나면 한 편의 글이 나온 것 같지만, 며칠 뒤 다시 읽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쓴 사람에게는 그 장면이 아직 살아 있어서 이 빈자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일기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기는 쓴 사람 한 명만 독자로 두어도 성립하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비언 고닉은 <상황과 이야기>(2001)에서 모든 글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상황은 정황이고 때로는 줄거리이며, 이야기는 글쓴이를 붙들고 있는 정서적 경험, 곧 깨달음이자 하려던 말이라는 것입니다. 일기에 머문 글은 상황만 적고 이야기는 적지 않은 글입니다.
그래서 초고를 쓰기 전에 두 줄을 먼저 적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래서 내가 하려는 말은 무엇인가. 두 번째 줄을 쓸 수 없다면 아직 소재만 골랐을 뿐, 쓸 것을 고른 것은 아닙니다. 그 상태로 밀고 나가면 마지막 문단에서 교훈을 급히 만들어 붙이게 됩니다.
소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에서 고릅니다
이미 답이 난 일은 쓸 것이 적습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알고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정해져 있다면, 남은 일은 그 결론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설명하는 글에서 독자는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겪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아직 마음에 걸리는 일에는 글쓴이도 모르는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독자는 그 모르는 자리를 따라 읽습니다. 그러니 잘 정리된 기억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억을 먼저 살펴봅니다. 아래 다섯 가지 가운데 셋이 맞으면 대개 쓸 만합니다.
- 지금 떠올려도 마음에 한 번 걸리는 일인가
- 그때의 판단과 지금의 판단이 다른가
- 남에게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하게 되는가
- 그 이야기에서 내가 유리하지 않은 자리에 서는 대목이 있는가
- 한 장면으로 시작할 수 있는가
장면을 앞에 놓고 생각을 뒤에 둡니다
생각부터 꺼내면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둘로 줄어듭니다.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장면을 먼저 보여 주면 독자는 그 자리에 함께 서고, 뒤이어 나오는 생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문장을 한 줄도 고치지 않고 순서만 바꿔도 같은 내용이 다르게 읽힙니다.
장면에 필요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언제인지, 어디인지, 그때 눈에 들어온 것 하나, 오간 말 한마디면 됩니다. 감정을 형용사로 적는 대신 그 감정이 붙어 있던 사물을 적습니다. 슬펐다고 쓰면 독자는 그 말을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식어 있던 국그릇을 적으면 스스로 슬픔을 느낍니다.
요약은 장면 뒤에 나와도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면을 본 독자가 요약을 기다리게 됩니다.
친밀함은 털어놓은 양이 아닙니다
필립 로페이트는 1994년에 엮은 <개인 에세이의 기술> 서문에서, 개인 에세이의 표지는 친밀함이며 글쓴이가 독자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적었습니다. 개인 에세이를 개인 에세이답게 만드는 것은 소재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말을 거는 거리라는 뜻입니다.
이 친밀함을 비밀의 양으로 오해하면 글이 이상해집니다. 감추던 것을 많이 적을수록 독자는 오히려 물러납니다. 독자의 자리가 대화에서 구경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가까이 데려오는 것은 폭로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아직 판단이 서지 않은 일을 그대로 적고,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은 사실을 먼저 밝히는 편이 훨씬 가깝게 들립니다.
남이 나오는 글에는 선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실명, 직장, 그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은 지웁니다. 지우고도 이야기가 그대로 남는다면 제대로 지운 것입니다. 지웠더니 이야기가 사라진다면, 그 글은 문장을 고치기 전에 그 사람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는 글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교훈을 걷어냅니다
되짚기와 교훈은 다릅니다. 되짚기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것을 적는 일이고, 교훈은 그것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는 일입니다. 앞의 것은 글쓴이의 몫이고 뒤의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독자의 몫까지 가져가 버리면 읽는 사람에게는 할 일이 남지 않습니다.
글을 닫는 방법은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하나는 첫 장면에 나왔던 사물이나 말을 한 번 더 불러오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는 자리에서 글이 닫힙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루를 매번 깔끔한 결론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고쳐 쓸 때는 하루 묵힌 뒤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만 다시 읽습니다. 손댈 곳은 대개 그 두 자리에 몰려 있습니다. 첫 문단에서 요약을 걷어내고 마지막 문단에서 교훈을 걷어내면 가운데 문장은 대부분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그러고도 마지막 줄이 자꾸 커진다면 아직 쓰지 않은 장면이 하나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일기와 에세이는 어디서 갈라지나요?
독자가 갈라놓습니다. 일기는 쓴 사람만 읽어도 성립하므로 상황만 적혀 있어도 괜찮습니다. 에세이는 남이 읽는 글이므로 그 상황이 무엇을 남겼는지가 드러나야 합니다. 한 줄이면 판정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가져갈 것이 한 줄이라도 있는가. 없다면 아직 일기입니다. 그 한 줄을 찾았다면 고칠 곳은 대개 마지막 문단이 아니라 첫 문단입니다.
기억이 흐린 부분은 어떻게 적나요?
흐린 대로 적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줄 적어 두면 글의 신뢰가 깎이지 않고 오히려 높아집니다. 위험한 것은 그럴듯하게 채우는 일입니다. 오간 말을 지어내 대화로 만들면 그 글은 에세이가 아니라 다른 장르가 됩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머지 문장까지 함께 의심받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확인합니다. 날짜, 장소, 인용한 문장은 찾아보면 대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