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만 깜빡이는 밤의 정체
첫 문장을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다 창을 닫아 본 적이 있다면, 문제는 실력이 아니라 역할입니다. 문장을 만들어 내는 작가와 그 문장을 평가하는 편집자를 동시에 하려고 하면 편집자가 항상 이깁니다. 문장이 태어나자마자 심사에서 떨어지니 글이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해법은 간단하지만 어색합니다. 두 역할을 시간으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초안을 쓰는 동안 편집자를 완전히 꺼 두고, 퇴고할 때 다시 켭니다. 이 글의 나머지는 전부 이 분리를 실제로 해내는 요령입니다.
초안은 형편없어야 정상입니다
작가 앤 라모트는 글쓰기 책의 고전인 <버드 바이 버드>(1994)에서 거의 모든 좋은 글이 형편없는 초안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초안의 목적은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재료를 일단 화면에 꺼내 놓는 것이고, 좋은 글은 두 번째, 세 번째 원고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완성된 글만 보고 그 뒤의 초안을 상상하면 누구나 자기 초안이 유난히 못났다고 느낍니다. 기준을 바꾸세요. 지금 쓰는 것은 글이 아니라 재료입니다. 재료가 다 나와야 무엇을 살릴지 고를 수 있습니다.
독자 한 명을 정합니다
모두를 위해 쓴 글은 아무도 자기 이야기로 읽지 않습니다. 쓰기 전에 실제 인물 한 명을 독자로 정하세요. 이제 막 같은 문제를 만난 1년 전의 나, 옆 팀의 신입, 특정 커뮤니티의 아무개면 충분합니다.
독자가 정해지면 결정이 줄줄이 풀립니다. 그 사람이 아는 용어는 설명 없이 쓰고, 모르는 용어는 한 줄 풀어 줍니다. 이미 아는 배경은 건너뛰니 분량도 줄어듭니다. 글이 막힐 때마다 그 사람에게 말로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지 떠올리면, 문장이 저절로 풀립니다.
아웃라인은 키워드가 아니라 문장으로
서론, 본론, 결론 같은 키워드 아웃라인은 막상 쓸 때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칸마다 무엇을 말할지는 여전히 백지이기 때문입니다. 아웃라인은 각 부분에서 주장할 내용을 완결된 문장으로 적어야 일을 합니다.
막힌 문단은 건너뜁니다
초안을 순서대로 쓸 이유는 없습니다. 예시가 안 떠오르면 예시 나중에 찾기라고 적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세요. 통계가 필요하면 숫자 확인이라고 표시만 하고 지나갑니다. 검색하러 브라우저를 여는 순간 초안 쓰기는 중단됩니다.
이렇게 밀어붙이면 초안 완주가 놀랄 만큼 빨라집니다. 그리고 끝까지 가 본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공들여 쓰던 앞부분이 사실 필요 없었다든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마지막 문단에 처음 나타났다든가. 초안의 절반은 이걸 발견하려고 쓰는 것입니다.
퇴고는 다음 날, 소리 내어
초안을 끝낸 직후에는 자기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루, 최소한 몇 시간이라도 재운 뒤에 퇴고를 시작하세요. 그리고 소리 내어 읽으세요. 눈으로는 매끄러워 보이던 문장이 입에서 걸리면, 그 문장은 고쳐야 하는 문장입니다.
퇴고에서 가장 효과가 큰 작업은 고치기가 아니라 지우기입니다. 주제와 상관없는 문단, 같은 말의 반복, 없어도 뜻이 통하는 수식어를 지우면 글은 짧아지는 게 아니라 빨라집니다. 아까운 문단은 따로 보관해 두세요. 다음 글의 씨앗이 됩니다.
제목은 맨 마지막에 짓습니다
글을 시작할 때의 가제와 완성된 글의 제목은 다른 물건입니다. 본문이 끝나기 전에는 이 글이 정말 무엇에 관한 글인지 확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제로 시작해서, 퇴고까지 끝난 뒤에 독자가 이 내용을 찾을 때 검색할 말로 다시 지으세요.
제목 후보를 서너 개 적어 놓고 하루 뒤에 고르면 실패가 적습니다. 그럴듯한 말장난보다, 글이 답하는 질문을 그대로 담은 제목이 검색에서도 공유에서도 오래 일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한 편 쓰는 데 얼마나 걸리는 게 정상인가요?
정해진 답은 없지만, 초안보다 퇴고에 시간이 더 드는 것은 정상이고 건강한 배분입니다. 초안 한 시간에 퇴고 두 시간이 걸렸다면 잘못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며칠째 초안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때가 순서를 점검할 시점입니다.
매일 써야 실력이 늘까요?
매일 발행할 필요는 없지만 쓰는 감각은 자주 쓸수록 유지됩니다. 부담을 낮추는 방법은 발행과 쓰기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매일 10분씩 재료를 모으고 초안을 조금씩 밀다가, 준비된 글만 발행하면 됩니다. 발행 주기보다 쓰다 마는 글을 줄이는 것이 실력에는 더 크게 작용합니다.
생성형 AI로 초안을 시작해도 되나요?
자료 조사나 구조 아이디어를 얻는 데는 유용합니다. 다만 초안 쓰기는 생각을 꺼내는 과정 그 자체라, 통째로 맡기면 내 관점이 담기지 않은 매끈한 글이 나오고, 그것을 내 글로 고치는 데 초안보다 오랜 시간이 듭니다. 재료 수집은 도구에 맡기더라도,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의 초안은 직접 쓰는 쪽이 결과적으로 빠릅니다.